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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우키시마호4] 오미나토 주변에 있던 해군들 “어떻게 적을 눈앞에 두고 방아쇠를 당기지 않을쏘냐?”

비무장 외국양민에게 군사적 조치
175명의 엔지니어들을 모두 생매장
가미시스카경찰서 학살과 노다•미즈호학살, 선상학살, 우키시마호폭침학살은 그 발생 동기의 공통점

 

주)우리신문 박현정 기자 |  

 

1945년 5월 8일. 스위스 주재 일본군 무관 후지무라 요시카츠藤村一義 중령과 미전략사무국 아렌 덜레스Allen W Dulles 사이에 비밀공작이 벌어졌다. 이 비밀공작에서 미국은 일본 측에 요구사항이 없었으나 일본은 미국 측에 세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하나는 천황 주권 유지를 인정해달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일본이 섬나라이기 때문에 배가 없으면 먹고 살길이 막막하니 현재 남아 있는 상선은 그대로 일본에 남겨둘 것을 요구했다. 마지막 세 번째 조건은 대만과 조선을 그대로 둘 것, 즉 대만과 조선은 일본인의 식량이 있는 땅이니 일본 영토로 인정해 달라는 것이었다.

 

미국이 초기에는 이를 승인하지 않았다. 이 공작은 당해 6월 오카모토 키요토미岡本淸福가 이어받아 집요하게 매달렸다. 말이 화평이지 일본 대본영의 집착은 순전히 한반도를 끝까지 영유하려는 동물적 근성이었다. 결국 미국은 한 달만인 6월 8일에 항복조건으로 조선 영유권을 승인했다.

 

그래도 일본은 항복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폭을 맞고도 3일간 항복을 고려한 일본 대본영이었다. 그래서 8월 9일 나가사키에 또 한방의 원폭을 투하했다. 이날의 전황이 소련에 전해지자 소련은 즉각 일본에 대하여 선전포고하고 사할린에서부터 일본 본토를 향해 진격했다. 이때 중국의 입장을 알 수 있는 책 《해방 초기의 연변》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사실상 우리들이 일본이 투항하였다는 소식을 듣기 전에 연안총부의 지도자들은 언녕 8월 9일에 소련 홍군이 동북에 진입하였으며, 일본제국주의가 곧 망하게 된다는 소식을 알고 있었다.

이런 정세에 비추어 연안총부에서는 1945년 8월 10일과 11일에 소속 각 부대에 련달아 투항접수명령과 소련군에 협력하여 작전하라.”는 등 일곱 가지 명령을 발포하였다. 그 중 제6호 명령은 다음과 같다.

 

소련 홍군이 중국 및 조선 경내에 진입하여 작전하는데 배합하며, 조선 인민을 해방하기 위하여 나는 명령한다. 지금 화북에서 항일작전을 하는 조선의용군 사령원 무정, 부사령원 박효삼, 박일우는 즉시 소속부대를 거느리고 팔로군 및 원 동북군의 각 부대와 함께 동북으로 진입하여 적들을 소멸할 것이며, 동북에 있는 조선 인민을 조직하여 조선을 해방하는 과업을 완수하도록 하여야 한다. 총사령 주덕 1945년 8월 11일 12시.》

 

이렇게 중국은 조선의용군도 소련 홍군을 도와 적 일본군을 무찌르라는 명령을 내렸다. 조선의용군이 사할린까지 가서 소련군과 합세했는지는 문헌으로 밝혀지지 않았지만, 만주지방에 남아있는 일본군에게는 타격을 가했을 것이다.

 

최후에 중국 연안총부의 명령이 떨어진 뒤부터는 조선인은 모두 적으로 바뀌었다. 이러한 조선인에 대해 군사적 조치가 내려진 날이 8월 13일로 보여진다. 당시 미국, 영국, 소련, 중국 연합국은 카이로회담에서 의결하고 포츠담선언에서 확인한 종전 방식과 처리에 대해 일본의 태도가 괘씸하여서라도 일본 본토를 4개국이 분할통치하고자 약속했었다.

그러나 8월 13일에 이르러 영국 처칠 수상이 미국 트루먼 대통령에게 “소련이 동북아에 군사교두보를 구축하려 한다.”고 통보하자 미국은 8월 13일 일방적으로 분할통치를 취소했다.

 

하지만 소련군은 사할린에서 홋카이도와 일본 본토를 향해 진격을 멈추지 않았다. 이때 일본 본토 아오모리현에는 강제징용과 강제노동과 고문치사 학살로 억압받아 온 조선인이 1만2천여 명이 집중돼 있었다. 이들 민족성이 강한 조선인이 진격해 내려오는 소련군과 합세하면 대규모 군단을 이뤄 소련에 할당되었던 일본 본토 북방지역이 소련군에 점령되는 것은 너무나 자명했다.

 

그래서 시모키타반도 일대 군사시설에 투입되었던 1만2천여 명의 조선인을 군사적 조치로서 긴급 소개해야 했다. 당시 오미나토 일대로 몰려든 조선인을 소련군 스파이로 몰아붙이는가 하면 조선인을 음해하는 유언비어가 난무했다. 모두 유도된 음모였다.

 

즉각 4개국 분할통치를 취소한 트루먼은 한반도를 38선으로 잘라 소련에게 나눠 먹자고 제의했다. 소련은 이를 수락했고 미국은 적 일본과 동침을 시작했다. 사실 이러한 군사전략은 사전에 정보교환으로서 시행이 가능하다는 게 기본상식이다. 당시 미국은 일본의 전후처리비용을 4개국이 분담하고자 분할통치를 시도하였으나 일본의 전후경제회생 비용을 걱정했던 일이 해소되었다.

 

그 비용은 1943년 1월부터 시작한 아시아 대규모 약탈작전이었던 황금백합작전(金のゆり)으로 일본 본토와 필리핀 루손섬으로 날라 지하터널 창고에 감춰둔 금괴와 보물들이었다. 우리는 이 175개 터널을 황실보물창고라고 말한다. 이 황실보물창고를 간략하게 소개하겠다.

 

황금백합작전(金のゆり

 

1943년부터 패전준비에 들어간 대본영은 그해 3월에 일왕 히로히토의 첫째동생 치치부를 결핵환자로 둔갑시켜 후지산으로 요양하러 들어간다고 신문에 거짓 보도하고 군복을 벗게 했다. 그리고는 침략함대 여섯 척을 병원선으로 위장하여 치치부에게 진두지휘토록 하였는바 동남아 일대에서 황금백합작전을 전개하여 한국은 물론이고 중국, 태국, 버마, 말레이시아,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지에서 황금불상, 금괴, 문화재, 재물을 대량으로 약탈했다.

이는 누가 보아도 해적•마적•산적•떼적•화적질이었다. 조상대대로 약탈유전자로 이어진 왜구의 근성을 그대로 나타내 보였다.

 

이 도적질은 일제가 전쟁에 지면 경제회생용 자금을 확보하려는 작전으로 아시아를 휩쓴 거대한 진공청소기였다. 일본인의 첫 번째 약탈리스트는 한국의 고려청자였다. 한국이 일본과 병탄된 이상 문화재 약탈은 더 이상 도둑질이 아니었다. 일본이 군사적으로 패배해도 필리핀은 계속 자국 영토로 보유되리라 예상하고 루손섬 전역에 175개의 지하저장고 즉 황실보물창고를 건설하였다.

 

황실보물창고가 완성되자 수석 엔지니어 175명 전원이 보물창고에서 술과 음식을 준비해 놓고 성과파티를 벌였는데, 한밤중이 되어 야마시타 토모유키 대장과 왕자들이 슬며시 빠져나오고 터널 안에 장치한 다이나마이트가 폭발하여 175명의 엔지니어들을 모두 생매장했다.

 

역시 황실보물창고를 지키려는 기밀누설방지수단이었다. 그때가 1945년 5월 초였다. 야마시타와 왕자들은 잠수함을 타고 본국으로 탈출했으며 3개월 후 미군에 항복했다. 와타나베 와타루 대령은 중국에서 10년을 보내면서 약탈과 강탈 수법으로 부유한 가문 소속의 중국인들을 납치해 귀, 코, 손가락에서 시작하여 유방과 고환에 이르기까지 신체 절단하기 등 각종 고문 기법을 개발했다. 특히 장자를 거세한다거나 여성의 난소를 제거하여 생식기능을 없애겠다는 협박이 가장 효과적이었다고 자랑했다.

 

치치부가 함장인 해적선은 동남아 전 해역을 항해하면서 약탈한 금괴는 청동상자에 넣어 필리핀 지하저장고와 일본으로 수송했다. 전쟁이 끝날 즈음에는 금괴를 가득 실은 채 마이즈루해병단이 있는 마이즈루만 바다속으로 가라앉혔다. 이 배는 1990년 일본인들에 의해 다시 발견되어 건져 올렸다. 일본의 이 같은 대규모 도적질은 패망 후 경제회생용으로 쓸 황금비축 전략이었다. 현대사회의 일본 경제는 한국인 강제연행•강제노동과 황실이 주도한 아시아 약탈의 산물이다.

 

앞서 말한대로 비무장 외국양민에게 군사적 조치를 취하는 것은 전쟁법 위반이다. 더구나 당시 아오모리현 시모키타반도에 있었던 한국인은 일본의 전쟁터에서 전쟁 수행 수단으로 강제노동에 시달렸던 사람들이었다.

 

일본군이 비무장 상태의 조선인을 적으로 간주했음은 1945년 8월 15일 직후부터 사할린에서 퇴각하던 일본해군들이 조선인을 무차별 학살한 데서 잘 나타난다. 8월 18일 사할린의 가미시스카경찰서 학살사건과 그 다음 날인 19일 노다•미즈호학살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일본인을 본토로 수송하는 선상에서 조선인을 색출하여 산 채로 해상투기학살을 자행했다. 이처럼 적으로 바뀐 조선인을 본토인 시모키타반도에 오래 머물게 한다는 것은 허용할 수 없는 일이었다.

 

특히 수년 동안 전쟁터에서 인간 살상을 일삼던 일본군들의 눈앞에 오래 머물게 한다는 것은 그들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꼴이었다. 소련군이 사할린에서부터 진격하여 내려오자 일본군은 망원경으로 소련군의 정세를 파악했다. 이때에 소련군에 황색인종이 있음을 알고 이들을 조선인으로 간주하고 조선인이 소련군을 안내하는 “스파이”라고 단정하고 그때부터 조선인을 닥치는 대로 학살했다. 소련은 다민족국가이기 때문에 소련군에는 황색인종이 있을 수 있었다.

 

실제로 오미나토 주변에 있던 해군들은 “어떻게 적을 눈앞에 두고 방아쇠를 당기지 않을쏘냐?”고 했다. 해군들의 이 같은 행동은 당시 군의 지휘체계로서는 하극상이 벌어지는 비정상적인 소행으로 서둘러 조선인을 축출해야 한다고 주장하게 되었다. 어쨌든 미국과 일본 사이의 2차대전 전후처리 전략은 더글러스 맥아더의 구상대로 상호 우호적이었다. 그것은 스위스에서 일본과 미국 사이에 전개된 비밀화평공작을 이행하려는 미국이 더 흥취를 올렸다.

 

일본 항복 당시 우키시마호는 북방 치시마 근해에 있었다. 대본영의 지시를 받고 오미나토항으로 이동하여 무츠만에 정박한 날이 8월 18일이다. 이런 상황에 사할린에서 자행한 가미시스카경찰서 학살과 노다•미즈호학살, 선상학살, 우키시마호폭침학살은 그 발생 동기가 세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다. 첫째는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킬지 모른다는 불안감. 두 번째는 조선인이 소련군을 안내하고 있다는 소문(소련군 스파이) 세 번째는 소련군이 들어오게 되면 일본인이 저지른 죄악상을 소련군에게 폭로할 것이라는 점이었다.

미국은 우키시마호폭침사건을 덮어버리는 과정에서 스위스 비밀협약 세가지 조건을 다 들어주었다. 우키시마호폭침사건 조작•은폐는 미국이었고, 일본은 이에 좋아라 춤을 추었다. (2023. 4.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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