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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우키시마호 2] 조선인은 그곳에서 무엇을 했나 1

 

주)우리신문 박현정 기자 |  

 

조선인은 왜 그곳에 있었나?

 

1942년 12월 7일. 일제는 하와이 오아후섬의 진주만에 있던 미국 해군기지에 카미가제(神風)자살특공대를 투입하여 기습공격을 감행했다. 한 달이 지난 1월 초 미군의 반격을 예상한 일제는 지구의 ⅓에 해당하는 광활한 지역을 절대방위권으로 설정했다. 곧 전함을 정비한 미 해군의 반격은 전세를 뒤집기 시작했고, 북태평양 진격은 기정사실화 되었다.

그곳이 바로 일본 본토 최북단인 아오모리현 시모키타반도이다. 시모키타반도는 북으로는 홋카이도의 하코다테 해군기지와 츠가루해협을 끼고 마주보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미사와비행장과 인접해 있다. 미 함정이 일본 본토를 공략하려면 츠가루해협의 제해권과 제공권을 거머쥐어야 했다. 1943년에 들어서서 미군이 북태평양을 접수하고 동해 진격과 일본 본토 상륙이 가장 용이했던 시모키타반도는 이를 저지할 군사시설이 필요했다.

6만 명의 해군이 3개월 동안 외부와 지원이 끊겨도 견딜 수 있는 각종 군사시설과 장비를 갖추어야 했다. 이에 이르자 일제 전쟁총지휘본부인 대본영 군통수권자 히로히토는 해군성에 명령을 하달했다. 명령은 『조선인 9천명을 투입하라!』였다.

이미 아베시로광산에는 1만여 명이 넘는 조선인이 일하고 있었다. 여기에 더하여 군사시설 공사장에 9천 명을 투입하게 된 것이다. 일본의 군부와 기업에 의해 강제연행된 조선인을 모두 이 공사장에 투입하였다. 여기서 잠시 강제연행•강제노동과 고문•치사•학살로 점철된 노동현장을 가보자.

 

 

우선 1941년 12월 7일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뒤에 시모노세키 항과 하카다 항을 거쳐 아오모리 역에서 하차하여 시모키타반도까지 끌려간 한국인들은 제1선 상비노동력으로 투입되었다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태평양전쟁 발발 이전에는 주로 군수공업 공장이나 석탄광산, 비철광산에 투입되었으나 개전 이후에는 군사요충지의 최전방인 홋카이도, 치시마열도, 사할린, 캄차카반도, 아오모리현 시모키타반도에서 연합군과 본토 결전을 대비한 군사시설 공사장에 투입되었다.

 

이때 우키시마호에 승선했던 한국인들의 노동 현장은 험준한 산악지대인데다가 공사를 시급히 완공해야만 했기 때문에 그 운영 면에서 가혹하기 짝이 없었다. 그들은 짐승우리 보다도 더 열악하다고 볼 수 있는 타코방에 수용되었다. 가혹한 노동과 뭇매질에 못 이겨 탈출을 시도하여 거리나 기차역으로 나가면 일본 해군과 헌병에게 붙들려 다시 공사현장으로 넘겨졌다.

 

노동현장 주위에서는 하청업체의 감독과 헌병들이 감시의 눈초리를 늦추지 않았다. 이 점이 바로 강제연행과 강제노동은 일본 정부와 기업간의 공조체제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것이다. 이같이 가혹한 노역장에 투입된 조선인들은 일본 기업이나 군부의 목적에 따라 해당 공사장으로 따로따로 배치되었다. 충남 천안군 사람들은 일본통운주식회사에 배속되어 오미나토 항에서 군수물자를 하역했고, 충남 청양군과 전북 진안군에서 끌려간 사람들은 해군 23부대와 24부대에 배속되어 가바야마 해군비행장을 만들었고, 충북 영동군, 보은군, 충주시 일대에서 1차로 끌려간 6백여 명은 미사와비행장을 만들면서 활주로와 지하탄약고와 방공호를 만들었다. 미사와비행장 공사장에서 일할 때 반항하는 한국인들은 모두 홋카이도나 사할린의 해군 군사시설 공사장인 도로, 항만, 산림벌채, 탄광으로 보냈고 이와테현에 있는 채석장으로도 강제 후송했다.

 

일본 대본영의 원청업체인 세자키조瀨崎組, 아이자와조相澤組, 고야나기조小柳組, 지자키조地崎組, 하기와라조萩原組, 스가와라조菅原組, 우사미조宇佐美組, 다케우치조竹內組, 사사키조佐佐木組, 사이토濟藤組는 홋카이도에서도 악명 높았던 타코방식 노무관리제를 도입하여 오미나토해군경비부 관할지역 비행장 건설, 1만톤급 도-크 건설, 군항만 수리, 방공호 파기, 터널 뚫기, 석탄 운반, 산림 벌채, 각종 포대 그리고 수많은 사상자를 낸 오마철도 공사를 한국인의 인력으로 강행했다. 원청업체는 다시 하청업체한테 공사를 맡겼다.

 

이렇게 한국인을고용한 하청업체는 우키시마호에 승선한 한국인들의 노동현장과 직접 관련된 시모키타반도의 “오미나토, 오하타, 시모후로, 키노푸, 카부도사키, 타나부, 구와하타, 쓰리야하마, 노헤지, 가바야마, 미사와” 등지에서 참혹한 노예적 노동을 강요했다. 원청업체인 ‘다케우치조’ 는 토건업체로 1999년 현재까지 무츠시에서 영업을 계속하고 있고, 일본통운주식회사는 세계적인 운수회사로 성장하여 미국과 한국에 지점을 두고 있다.

 

그들은 강제징용한 조선인을 인간으로 보지 않았다. 악마 그자체 였다.

 

 

모키타반도에 있는 공사장이 다 그랬지만 더욱 사고 위험 확률이 높았던 키노푸 터널 공사장에는 오마철도 공사장 가운데 가장 악명 높았던 타코방이 있었다. 이곳이 바로 화형과 매질과 고문을 일상처럼 자행했던 곳이다. 마음에도 없던 징용에 따라야만 했던 수많은 한국의 젊은이들은 낙반사고를 막는다는 왜놈들의 몰지각함 때문에 산 채로 제물로 매장당하고, 동료들이 보는 앞에서 화형당하고, 일하던 공사장 모퉁이 잿더미에 그대로 묻히고, 일하다가 입은 상처에서 구더기가 우글거려도 치료도 못 받고, 마른 고구마 줄기와 호박껍질과 감자껍질과 삶은 고사리로 굶주린 배를 달래야만 했다.

 

키노푸 마을은 겨울에는 북풍한설을 정면으로 받아들이는 지형으로 눈이 많은 데다가 뒤쪽은 깎아지른 듯 산이 절벽처럼 가로막고 있으며 앞에는 검푸른 바다가 태평양으로 이어지고 있다. 먹을 것이란 주먹밥과 소금에 저린 짜디짠 청어 한 토막과 시래기 국물이 고작이었다. 일하던 조선인들이 산속으로 탈출을 시도하여 산에서 굶어 죽기도 했다. 시체가 계곡물에 잠겨 아래쪽에서 계곡물을 먹고 사는 주민들이 송장 썩은 물을 마셨다고 거세게 항의하기도 했다.

 

고문, 그것은 상상 그 이상의 것

 

먹을거리도 없고 입을 것도 없이 키노푸 해변에 매어있는 조각배에 몸을 싣고 망망대해인 태평양을 향하여 정처 없이 흘러가던 그 광경을 당시 주민들은 직접 목격했다고 말했다. 물론 도망자가 다시 잡혀 오기라도 하면 그에게 가해지는 고문은 상상을 초월했다.

 

정신을 잃도록 두들겨 패다가 찬물을 끼얹는 것은 그래도 약한 고문이었다. 천정에 거꾸로 묶어 매달아 놓고 밑에 장작불을 지펴 천천히 익혀 죽이는 참혹한 화형 장면을 주민이 목격하고는 그 광경을 끝까지 볼 수 없었다고 현지인들이 증언했다. 하청업체의 직원이었던 감독들의 잔혹성을 가히 짐작할 만하다. 길이 440미터에 이르는 야케야마 터널 공사장에서는 일하던 조선인이 죽으면 콘크리트를 붓던 속에 시체를 밀어 넣고 매립했다는 증언이 있음을 근거로, 현지 시모키타지역문화연구소 사이토 사쿠지 소장은 터널 벽을 엑스레이로 사진이라도 찍어보자고 제의했다.

 

뿐 만 아니라 옷과 신발은 단 한번만 지급되었다. 여름이나 겨울이나 늘 같은 복장이었고, 여름에는 거의 신발을 신지 못했다. 겨울에는 시멘트부대 종이로 둘둘 말아 끈으로 묶고 다녔다. 실로 영하 30℃를 오르내리는 혹한 속에서 구겨진 휴지조각이나 다름없었던 해진 옷을 몸에 걸치고 무자비하게 쏟아지는 뭇매까지 견뎌야 했다.

 

어느 감독은 조선인을 타코방에서 공사장까지 인솔할 때 대열에서 조금이라도 비틀대면 끝에 뾰족한 못을 박은 몽둥이로 꾹꾹 찌르는 비열한 수법까지 쓰기도 했다. 동이 트기가 무섭게 숙소에서 나와 공사장으로 가야 한다. 가는 길목에 통나무 기둥 위에 묶어 놓은 시신은 어제 숨진 청년이었다. 지나가던 감독이 일본도로 옆구리를 푹 찔렀다. 겨울이라서 동태처럼 얼어 피가 흐르지 않았다. 길목에 매달아 놓은 것은 공사장으로 가는 조선인에게 위협과 협박을 가하려고 그랬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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