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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특집기획] 잊혀진 비극의 그 이름 우키시마호

강제징용 했던 조선인 노동자들이 탄 배의 폭발
엇갈린 진술과 일본의 이해 할 수 없는 일처리

 

우키시마호는 원래 화물선으로 1937년 건조되어 1941년부터 군수 물자를 실어 날랐던 배이다. 일본은 패망이 후 강제 징용된 조선인 노동자들이 타고 일본의 오미나토 항에서 부산항으로 출발 했으나 중간에 폭발되어 많은 사망자가 발생한 사건이다. 하지만 이 사건은 아직도 많은 의혹이 남아있으며 지금은 일부 생존자들의 후손들이 의혹을 풀기 위해 많은 노력들을 하고 있다. ㈜우리신문은 우키시마호 사건을 잊지 말자는 뜻으로 이 사건을 알리고자 한다. (편집자 주)

 

주)우리신문 박현정 기자 |  

 

 

우키시마호 사건은

 

1945년 8월 22일, 패망 이후 일본 전범 재판과 관련하여 강제징용 했던 조선인 노동자들이 폭동을 일으킬지 모른다는 우려 하에 일제는 수많은 조선인 노동자들을 일본 해군에서 징발한 4,740톤급 화물선 우키시마호(浮島丸 우키시마마루), Ukishima Maru)에 태워 오미나토 항에서 부산으로 돌려보내라 명령한다. 그런데 이렇게 오미나토에서 출항한 우키시마마루호(이하 우키시마호)가 돌연 방향을 돌려 일본 마이즈루 항으로 향하더니 8월 24일에 해상에서 갑자기 폭음과 함께 폭발한 사건이다.

 

우키시마마루호의 폭발 의혹

 

폭발의 원인으로는 배에 함께 탔던 일본인 장교들이 부산에 도착했을 때 보복이 두려워 자폭했다는 주장과, 당시 미군의 명령대로 방향을 바꾸었을 뿐이며 만내에 부설했던 미군의 기뢰와 충돌하여 침몰했다는 일본 측의 주장으로 나뉜다. 

 

국내 상당수의 여론 및 특히 당시 우키시마호를 탑승했던 여러 한국인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우키시마호가 폭발한 것은 일본 해군의 계획적인 범죄"라고 주장한다. 우키시마호의 승조원들은 배가 부산에 도착할 경우에 분노한 조선인들에게 보복을 당할 것을 두려워해서 우키시마호에 조선인을 탑승시키라는 명령에 강하게 항의하고 항명했다는 것이다. 당시 조선인 징용자들을 조선에 남겨두자니 폭동이 우려되고 살려두자니 국제 사회에서 일제의 만행을 증언할 수 있었기 때문에 폭발 사고로 위장해 수장시킨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일본의 주장은 다르다. 미군이 부설한 기뢰에 우키시마ㅎ가 접촉하면서 폭발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당시 마이즈루만에는 미군이 부설한 기뢰들이 깔려 있었는데, 자기기뢰에 대해서는 우키시마호 자체의 장비로 탐색이 가능했지만, 음향기뢰는 소해정이 음향 발신기로 음향 기뢰의 위치를 파악하는 게 필요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아시아 태평양 전쟁기에 미군이 부설했던 기뢰의 규모는 상당하였기에, 종전 후 이 기뢰들의 해제를 위해, 일본 육해군이 공식적인 해산에도 소해부대들은 존속하게 되었다. 이들은 한국전쟁에 동원되기도 했으며 소해부대가 훗날 해상자위대의 모태가 된다.그런데 우키시마호는 마이즈루항으로 들어가라는 상부의 지시를 받기는 했으나 갑작스런 명령 전달 과정에서 혼동이 있어 길을 안내해야 하는 소해정들이 제때 마중을 나오지 않았는데, 우키시마호는 소해정들이 나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마이즈루만으로 그냥 들어갔다가 기뢰가 있는 수역으로 진입하여 음향 기뢰가 엔진음에 반응하여 폭발하게 되었다는 주장이다. 이 기뢰에 대해 일본에서는 "음향기뢰가 아닌 수압식 기뢰일 가능성도 크다"고 말한다.

 

일본 측에서는 "마이즈루에 입항한 것은 배의 연료가 떨어졌기 때문이며,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승조원과 탑승자들 대부분을 함선의 데크(갑판)로 유도했기 때문에 오히려 피해가 적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우키시마호의 이상한 항로

 

우키시마호는 일본 북부의 아오모리 현의 오미나토 항을 출발해 부산으로 향했다. 상식적으로 일본 북부에서 부산으로 가는 가장 빠른 항로는 동해를 횡단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우키시마호는 일본 열도의 연안을 따라 내려갔다. 부산을 향해 가던 우키시마호가 갑자기 마이즈루항으로 방향을 바꾼 것도 의혹으로 제기된다. 이.또한 기뢰 및 잠수함의 위협 등 여러 요소를 감안해 일정을 짰다고 한다. 러시아 정부가 부정하는 `삼선 조난 사건`이라고 우키시마호가 출발한 다음날에 소련(현제 러시아)국적으로 보이는 잠수함이 세 척을 침몰시킨 사건 때문이라 주장하고 있다.그러나 한국에서는 "마이즈루로 방향을 바꾼 이유가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일본군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마이즈루 쪽으로 방향을 돌린 게 아닌가 의구심을 가지고 있다.

실제 어떤 생존자는 "배가 부산항으로 가는 게 아니라 원산항으로 간다고 듣기도 했다"고 전했다.

 

 

우키시마호의 탑승자와 사망자 수

 

일본은 "우키시마에 타고 있던 조선인 송환자는 3,725명, 해군 장병은 255명이었으며 이 가운데 조선인 524명과 승조원 25명이 사망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하지만 승선명부를 일본이 작성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정확히 몇 명이 승선하고 사망한지는 모른다. 간단히 말해 일본이 공식 발표한 승선자 수와 사망자 수는 많이 다르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생존자들은 "일본이 공식 발표한 숫자보다 더 많은 조선인들이 우키시마에 타고 있었다"고 주장한다.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라 확실치는 않지만, 대략 7,000명에서 7,500여명의 조선인들이 우키시마호에 타고 있었다고 한다. 사망자들의 숫자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생존자들과 당시 현지 주민들의 증언을 취합하면 최소한 1,000여명 이상이며 3,000~4,000여명, 심지어는 5,000여명이 사망했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사건 이후 배상 판결 기각 및 근황

 

1977년에 일본의 공영방송 NHK에서 다큐멘터리 <폭침>이 방영되면서 본 사건이 다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후 1992년 생존자와 유족들은 일본 법원에 일본 정부에 이 사건에 대해서 피해보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2001년 8월 23일, 교토지방재판소에서는 일본 정부의 안전 배려 의무 위반을 이유로 생존자 15명에게 1인당 300만 엔의 위로금 지급 판결을 내렸으나,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 요청은 기각했다. 그러나 이 판결마저 2003년, 오사카 고등재판소에서 번복되어 원고패소판결을 내렸다. 일본 법원은 설령 일본 정부의 책임이 있다 하더라도 한일기본조약에 의해 보상은 끝났다고 주장하며 기각 사유 중 하나를 밝혔다.하지만 설령 일본이 주장하는 대로 사고가 맞다 하더라도, 일본 정부가 이 사건에 대한 책임을 회피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기도 한다. 무엇보다 일제강점기의 관계 청산 논란을 떠나서 단순히 선박과 승선객의 관계에서 봐도, 본 사건은 아직 전시 상태이고 당시 일본 해군 병사들도 반대했을 정도로 위험했던 상황을 무시한 체 항해를 강행하여 수많은 승객들의 생명을 앗아간 안전사고로서 피해자 및 유족들이 충분히 배상받아야 한다는 주장이다.국내에서는 1993년 천안에 설립된 우키시마호 진상 위원회와 2011년 부산에서 설립된 우키시마호 폭침 한국 희생자 추모 협회가 계속하여 진상 규명을 촉구하여 왔으나 일본 정부는 물론 한국 정부 역시 2015년 이후로 조사를 하고 있지 않는 상황이다.현재 한국과 일본 양국에 사건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조형물이 있다. 한국에는 부산 중앙동 수미르공원에 희생자 위령비(2005)가 있고, 일본에는 우키시마호가 침몰한 해안 근처의 섬에 '순난의 비'가 있다.

 

     

아직까지 마이즈루만에 잠겨있는 유골들

 

 우키시마호 폭침 후 4개월 뒤인 1945년 12월,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일본 정부를 고발했으나 일본을 점령한 연합국 사령부는 증거 불충분으로 기각해 버렸다.

 그 후 일본 정부는 침몰한 배를 9년이나 방치해 두고 있다가 1954년이 되자 ‘희생자들의 유골 수습을 위해서’가 아니라 전쟁 후 피폐해진 한국에 철을 수출할 의도로 이노[飯野] 중공업주식회사로 하여금 선체를 인양하도록 했다. 끌어올려진 배에는 희생자들의 유골이 곳곳에 널려있어 그날의 비참함을 생생하게 상기시켜 주기에 충분하다.

1980년대 중반에는 일본인 잠수부들이 마이즈루만 바다 속에 들어갔다가 엄청나게 많은 유골들이 수습되지 못한 채 이리저리 널려 있는 것을 목격했다고 한다. 마이즈루만의 바다 밑은 자갈로 이루어져 있어서 시야가 매우 좋고 바다 속에 묻힌 것이 없어서 모두 드러나 보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도 마이즈루만에는 고향에 돌아오지 못한 원혼들이 수습되지 못한 채 차가운 바다 속에서 잠자고 있다.

 

그런데 배를 인양할 때 균형 장치(balanced tank) 부분은 360톤의 돌이 들어 있어서 그 무게 때문에 인양을 포기했다고 한다. 배의 승선 정원이 훨씬 초과된 상태에서 돌을 360톤이나 실었다는 것은 정상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로 이것은 의도적으로 배를 빨리 침몰시키려고 한 짓이 아닌가 의심할 수 있는 부분이다.

 

우키시마호 사건 직후 일부 수습된 희생자들의 시신은 모두 화장되었고, 그 유골들은 도쿄[東京] 메구로구[目黑區]의 절 유텐지[祐天寺]로 옮겨졌다. 유텐지에는 2,328위의 한국인 징용·징병자 유골이 보관되어 있었다가, 1970년~1998년 사이에 1,192위의 유골이 송환되고 아직 1,136위의 유골이 남아있다. 그중 234위의 유골이 우키시마호의 희생자들이라고 한다. 이곳에서는 1989년 이래 매년 추도회를 개최하고 있기는 하지만, 희생자들의 위패를 ‘태평양전쟁조선반도출신구일본군전속전몰자령위(太平洋戰爭朝鮮半島出身舊日本軍戰屬戰歿者靈位)’라고 하여 이들을 일본을 위해 죽어간 ‘일본군’으로 모시고 있으며 심지어 위패가 보관되어 있는 사당 문 안쪽에는 ‘전쟁의 영웅(戰爭の英雄)’이라는 푯말까지 걸어놓았다.

 

 

아래는 생존자 유족이 이야기하는 [우키시마호 사건의 전반적인 내용]의 인터뷰 전문이다

 

 

일본이 벌인 태평양 전쟁 중에 일본젊은이 들은 전쟁터에 보내고 빈자리. 광산 및 산업현장에 침략국 젊은이들을 강제로 차출하여 강제노역을 시킨 것을 우리는 강제징용이라고 합니다.

침략국 젊은이들을 전쟁터에 보내지 않는다는 것은 그들이 불만을 가지고 일본을 대항할까 두려워 일본은 젊은이들은 전쟁터에 보내고 강제징용자들을 온갖 노역으로 보내졌습니다.

그러나1945년8월15일 일본이 항복하면서 일본전지역에 강제징용당하여 노역하던 사람들이 그리운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우키시마는 훗가이도 및 아오모리에서 광산에서 일하던 조선인을 태우고 오미나토항에서 출항하여 부산으로 돌아와야하는 귀국선 이었습니다

조선인들은 광복의 기쁨을 않고 탔지만 귀국선은 부산으로 오지 않고 1945년8월24일 오전10시경 마이즈루항 으로 입항하려 하자 배가. 갑자기 폭발하여 침몰한 사건입니다.

 

이 배에는 공식3735명 비공식 8000여 명 중 사망자 공식 조선인 524명 일본인 25명 비공식 5000여명 사망이라고 알려진 사건인데 실종자는 하나도 알려지지 않고 비공식적으로 3000명 생존했다고 일본 측이 주장하고 있습니다.

 

정확히 몇 명이 실종되고 탑승자는 몇 명인지 알리지 않은 상태에서 77년이란 세월을 묻혀 둔 것 입니다.

 

일본은 자신들이 저지른 만행이 국제적으로. 알려지는 것이 두려워 지금까지 감추려고 하고 한국정부도 적극적인 조사를 요구하지 않고 있는 사건 중 하나 인 것 입니다.

우키시마호의 생존자들도 이제는 거의 모두가 고인이 되셨습니다만, 유족들이라도 이제는 적극적으로 나서서 진실을 밝히고 시신은 발굴하여 고국으로 모셔 와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강제징용 가셔서 행불된 유족이나. 살아 돌아오신 유족들도. 이 기사를 보시고 신청하여 주시면 진상규명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더불어 우키시마호 사건을 잊지않고 되새기고 알릴수 있게 해주신 (주)우리신문에게도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감사합니다

생존자 유족 전 용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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