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우리신문 박현정 기자 |
카멀라 해리스(민주당 대통령 후보)와 도널드 트럼프(공화당 대통령 후보)의 대결, 또는 진보 정치와 보수 정치의 대결 이전에, 미국의 역사를 관통하는 '문화 전쟁'인 듯 싶었다.
지난 20∼25일(현지시간) 선거인단 16명이 걸린 미국 조지아주에서 최대 도시 애틀랜타와 그 교외 지역의 사전투표 현장, 양 후보의 대규모 유세 등을 취재하면서 기자는 나름대로 내달 5일 대선의 의미를 이렇게 규정해 보았다.
기독교인이 많은 미국 남부 주들을 의미하는 바이블벨트의 핵심으로 꼽히는 조지아에서 공화당은 '백인 앵글로색슨 신교도'(WASP·와스프) 중심의 옛 미국에 대한 향수를 되돌려줄 '인물'로 트럼프 전 대통령을 다시 소환한 듯 했다.
그에 반해 민주당은 19세기 노예해방과 20세기 민권운동 투쟁의 시기를 거쳐 종교와 인종, 가치관 면에서 한층 다원화한 지금의 미국을 유지하는 데 있어 '실존적 위협'으로 간주하는 트럼프 전 대통령을 누를 '대안'으로 급히 나선 해리스 부통령을 중심으로 단결하고 있었다.
지난 23일 애틀랜타 교외 덜루스의 가스사우스아레나에서 열린 트럼프 전 대통령 유세와 그 이튿날 역시 애틀랜타 교외 클락스턴에서 열린 해리스 부통령-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 공동 유세는 미국 정치의 심각한 양극화 속에 미국의 '복고'와 '현상유지' 세력간 세대결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듯 싶었다.
백인들이 절대 다수였던 트럼프 전 대통령 집회에서는 종교(개신교) 색채가 두드러졌다.
주기도문으로 참가자들이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고, 벤 칼슨 전 주택·도시개발부 장관은 지난 7월과 9월 두차례 암살 시도에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목숨을 건진 것은 신의 섭리라는 점을 부각해 뜨거운 반응을 유도했다.
또 여러 연사들이 민주당의 성소수자 권익 강화 기조를 신랄하게 비난했다. 특히 "나는 남자와 여자를 구분했던 민주당이 그립다"는 조시 맥쿤 조지아주 공화당 의장의 발언에 청중들은 뜨겁게 환호했다.
물론 해리스 부통령이 몸담은 바이든 행정부의 실정에 대한 직접 공격도 있었지만 그 근간에는 미국의 인종적 다양성 확대와 맞물린 진보 진영의 세확장에 대한 보수 세력의 저항감이 자리잡고 있었다
조지아주 인구의 약 30%를 차지하는 흑인들이 청중의 절반은 됨직했던 민주당 유세는 반(反)트럼프 궐기대회를 연상시켰다.
미국의 첫 흑인 대통령이었던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과 해리스 부통령, 그리고 다른 찬조연사들은 민주당 나름의 비전 제시보다는 트럼프 전 대통령 집권시 잃게 될 것들을 강조하는데 방점을 찍었다.
트럼프 집권시 미국의 여성 낙태 자유가 박탈당할 것이라는 주장에서부터 트럼프가 독재자가 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등의 주장이 유세의 핵심이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낙태권과 관련, 전국적 금지가 아닌 주별 결정에 맡긴다는 입장이지만 민주당은 '트럼프=낙태반대론자' 프레임을 강조했다. 또 트럼프 전 대통령이 최근 선을 긋고 있는 보수 싱크탱크 헤리티지 재단 주도의 정책집인 '프로젝트2025'를 트럼프의 공약집으로 규정했다.
유세에서 3곡을 부른 미국 정상급 록스타 브루스 스프링스틴과 할리우드 인기 배우 새뮤얼 잭슨, 영화감독 스파이크 리, 타일러 페리 등 미국 대중문화계의 별들이 여럿 참석해 트럼프 비판 대열에 가세했다.
따라서 두 유세 현장에 모인 사람들 사이에 접점은 거의 찾을 수 없었다.
조지아주에서 만난 양당 지지자 개개인의 목소리에도 서로 건너기 어려운 간극이 있었다.
민주당 지지자들은 자유·민주주의와 현 체제에 대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위협을 강조했다.
포리스카운티에서 열린 민주당 지역 선거 후보 유세 행사에서 만난 60대 남성 드로이 씨는 "여성의 신체에 대한 자율권, 총기로부터의 안전, 투표권 등과 관련한 우리의 자유가 잠식당하고 있다"며 "카멀라 해리스가 대통령이 되지 못하면 민주주의는 살아남지 못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또 같은 곳에서 만난 중학교 교사 존 딜스(32) 씨는 "카멀라 해리스는 공교육에 돈을 쓰기로 맹세한 반면 트럼프는 교육부를 폐지하겠다고 했다"며 교육 정책에 대한 차이를 강조했다.
반면 공화당 지지자들은 민주당 바이든 행정부 하에서 상승한 물가와 불법 이민자들의 범죄 위험 등 생활과 밀접한 문제를 거론하며 해리스 부통령이 몸담고 있는 현 바이든 행정부의 실정을 비난했다.
트럼프 유세 현장에서 만난 30대 여성 진저 씨는 "나는 이민자를 좋아하고, 합법적으로 입국해서 정착한 이민자들을 안다"며 "그러나 위험한 사람들이 입국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밝힌 뒤 "그들(민주당)은 불법이민자들을 들여와서 돈을 벌게 하면서 우리는 신경쓰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또 "나는 내 딸이 스포츠를 하는데 그 아이가 여자애들과 경쟁하길 원한다"며 "(성전환한) 남자와 경쟁한다면 나는 내 딸을 그 스포츠팀에서 분리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애틀랜타 시내에서 만난 22세 초년병 직장인 남성 가브리엘 페이지 씨는 "개인적으로 식료품값이 비싸고 연료비가 비싸서 꽤 괜찮은 첫 급여로도 근검절약해야 살 수 있다"며 "나는 이렇게 4년 더 살기를 원치 않는다"고 말했다.
직전인 2020년 대선에서 민주당 조 바이든 대통령이 불과 0.2% 포인트 차이로 트럼프 전 대통령에 승리했던 조지아는 이번에도 치열한 접전을 예고하고 있다.
최신 여론조사에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많게는 4% 포인트(애틀랜타저널컨스티투션의 7∼16일 조사)까지 앞선 것으로 나타났지만 그동안 해리스 후보에 뜨뜨미지근했던 민주당 지지 성향의 흑인 남성 등이 막판 결집할 가능성을 민주당 측에서는 기대하고 있다.
케빈 올라사노예 조지아주 민주당 사무국장은 대선을 2주 남긴 지난 22일 "선거에서 14일은 한평생과도 같다"며 가가호호 방문 등 밑바닥 표심 훑기에 나설 의지를 피력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4년전 1만1천여 표 차이로 자신이 패한 것으로 나타나자 주 총무장관에게 전화를 걸어 그 만큼의 표를 찾아내라며 압력을 행사한 곳이 바로 조지아주다.
이번에도 4년전과 같은 박빙 승부로 귀결될 경우 개표 결과 승인 거부 등을 둘러싼 양당간 법적 공방이 벌어질 가능성도 없지 않다고 많은 관측통들이 우려한다.
애틀랜타에서 태어난 흑인 민권운동의 상징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는 1963년 '내겐 꿈이 있습니다' 연설을 통해 조지아에서 인종을 초월한 형제애의 '식탁'이 차려질 날을 꿈꿨다.
하지만 양극화한 미국 정치는 조지아에서 평화롭게 투개표 절차를 진행할 수 있을지조차 걱정하게 만들고 있었다.